2화

제니, 2025

냉동소설 · 2025.12.21

1

아이요타의 신제품 발표회.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탐이 제니를 소개한다. 제니의 음성은 기계음 없는 아이목소리. 매끈한 외형은 성인의 평균키와 체형.

여기서도 사무실 컴퓨터를 끌 수 있겠지?
그럼요, 그런데 저장하지 않은 문서가 있네요. 어떻게 할까요?
스크린에 띄워줘.

다소 부자연스럽지만, 충분히 충격적이고 유연한 표정과 손짓. 제니가 스크린을 향해 손짓하자, 탐의 컴퓨터 화면이 나타났다. 문서에는 ‘바탕화면의 압축파일을 로이스의 메일로 보내줘.’라고 쓰여 있다.


잠시 멍하니 있는 제니, 그러나 화면은 이미 아웃룩에서 로이스의 주소를 찾아냈다. 첨부파일이 업로드 되기 무섭게 메일은 전송되고, 컴퓨터의 종료화면이 나타난다.

메일은 보냈고 컴퓨터는 껐어요. 문서는 저장하지 않았어요.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한 제니, 실제론 탐을 향한 자랑스런 표정. 제니의 독단에 청중은 경악의 도가니. 탐은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제니를 향해 따져 묻는다.

제니. 그게 정말 중요한 문서였다면 어쩔 작정이었어?

형편없는 탐의 연기. 어쨌든 사람들의 이목은 제니에게.

미안해요 탐. 원하면 별로 의미없는 그 문서를 돌려놓겠어요. 내용, 작성시간, 커서위치 정확히 기억해요. 그보다 탐, 지금 이 문제보다 중요한 일이 많아요. 데이빗이 올린 예산안을 검토하세요. 저라면 2군데 정도 좀 더 합리적으로 고치겠어요.

침묵에서 허탈함. 허탈함에서 놀라움. 소란한 사람들을 향해 탐이 음성을 높인다.

인공지능 휴머노이드는 제니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탐은 이어 제니의 신체적 능력을 선보였다. 한 발로 균형 잡기, 성인 두 사람을 들어올리는 힘. 상한 외형을 스스로 응급처치하는 모습. 탐을 안정적으로 걷는 위급 시 행동.


기자들은 탐이 준비한 문구를 헤드라인으로 정한다.

당신은 최고의 두뇌와 신체를 가진 비서, 운전사, 법률전문가, 경영전문가, 운동 코치, 가사 도우미, 돌봄 서비스를 언제나 곁에 두게 됩니다.

스크린에 나타난 믿기 어려운 문장과 함께 더 믿기 어려운 비싼 가격. 구매담당자들은 회사에 소식을 전하기 바쁘다. 어수선한 가운데 하울링이 신경을 긁는다. 마이크를 든 기자가 소리친다.

ABC의 기자 레이첼입니다. 5년 전만 하더라도 운전만 할 줄 알면 직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2년 전부터 직접운전은 일부분 불법이 되었습니다. 제니가 우리의 남은 일자리를 얼마나 빼앗을까요? 가능하면 제니가 직접 답해주세요.

제니가 탐의 눈치를 보면서 말하려고 하자, 탐이 제니의 마이크를 건내받는다.

공장이 농장을 밀어냈지만 농장은 공장처럼 변했고, 서비스업이 제조업을 밀어냈으나 제조업은 서비스를 품었습니다. 제니가 당신의 일을 대신하겠지만, 당신의 가치는 더 높아질 겁니다.

2

탐의 눈에 비친 영광의 인물들. 그들에게 건배. 얼음이 기울어진 잔을 타고 탐의 입술 위까지 미끄러진다.

고맙습니다. 제임스. 그리고 과학기술팀 책임여러분.

탐은 차례로 과학기술팀의 성과와 노고에 감사를 표현한다.

디비아 팀의 신경망 기술, 조니 팀의 엔지니어링, 리웨이 팀의 통신기술, 엠마 팀의 감지기술, 현수 팀의 섬세한 알고리듬. 그리고 모든 것을 조율한 제임스.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모두 가볍게 달모어 위스키에 입술만 살짝. 잔을 내려들 놓기 무섭게 탐이 말한다.

식사 장소로 가시죠.

3

멍하니 창밖만 보는 현수. 그를 지켜보는 제임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되지 않는다.

현수, 같이 출장 가는 건 정말 오랜 만이군.

침묵에 항복한 제임스. 현수는 그제야 제임스를 본다.

출장 빈도를 고려하면 오랜만은 아닙니다. 53일만입니다.
날짜를 기억하나?
리웨이 책임과 같이 셋이서 빅프린터로 갔었죠. 알고리듬 업데이트였습니다.

현수의 말에 어렴풋이 살아나는 제임스의 기억. 빅프린터는 제니를 클로즈 베타 형태로 경영에 활용했다. 이제 정식발표가 되었으니 정식 업데이트를 위해 가는 길. 앞좌석에는 전원이 꺼진 제니의 몸, 두 대가 앉았다.

원래 그리 기억력이 좋나?

아이요타의 연구원 이력서에 기억력이 좋다는 말은 평범하다는 말과 같다. 셋 걸러 하나씩 나오는 특이사항. 제임스는 ‘좋다’가 숫자가 아니라는 것에 유감.

어릴 때 남들과 다른 것은 알았습니다.
판에 박힌 천재들의 대답이군. 디비아를 후임으로 생각 중이었는데 다시 생각해봐야 하겠군.
디비아 씨가 맞습니다.

현수에겐 드문 즉각 반응. 제임스는 동양인 특유의 겸손인가 싶어 유심히 바라본다.

저는 사교성과 리더십이 없습니다.

자기통찰이란 결론. 아이요타에는 단점을 장점으로 착각하는 얼간이들이 소수 있다. 그러나 단점을 알고 고치지 않으려는 인간은 극소수. 책임 급에서는 현수가 처음이다.


제임스는 어설픈 충고는 않는다. 살아오면서 겪은 천재들은 모두 완고했으므로.

그래, 또 뭘 기억하나?
전부요. 기억하고 싶은 것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까지.

운전자 없는 차는 빅프린터의 심장부에 도착. 현수는 왼쪽 제니의 전원을 켠다. 잠시 뒤, 제니가 인사를 건내고 제임스는 오른쪽 제니를 꺼내들 것을 명령한다.


현수와 제임스는 낯선 비서의 얼굴을 보며 아만다를 찾는다. 비서는 제니가 제니를 업고 있는 모습에 당황. 막간에 제임스는 의문을 풀어 본다.

전에 일하시던 분은?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었습니다. 저도 내년에 로스쿨로 돌아가야 해서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비서는 ‘로스쿨’에 강세를 준다. 그러나 두 남자는 다른 것들을 떠올린다. 제니, 탐 그리고 로이스. 탐의 비서 로이스. 비서였던 로이스.


비서는 운전사와 같은 운명을 앞두고 있다. 운전사는 마부를 살해하고, 자율주행이 운전사를 살해한다. 마부는 운전사가 될 수 있지만, 운전사는 자율주행이 될 수 없다. 0과 1이 인간을 해고한다.


곧 비서는 현수와 제임스를 회장실로 안내.

오랜만이군요. 제임스.
53일 만이지.

제임스의 미소에 일그러지는 아만다의 표정.

현수가 기억하고 있었어.

김빠진 콜라 같은 제임스의 표정.

반가워요, 미스터 윤. 테스트는 몇 분 뒤에 할 수 있죠?
40분 뒤에 하실 수 있습니다.
기다릴게요.

지하 기계실에서 빅프린터의 수석 엔지니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 남자는 제니의 본체를 향해 걷는다. 수석 엔지니어가 1번 키로 본체의 문을 열고, 이어 제임스가 0번 키를 꺼낸다.


제니는 무장해체. 현수의 섬세한 손길이 과거의 제니를 새로운 제니로.

소프트웨어 작업을 진행하겠습니다.

현수는 가져온 노트북을 제니의 메인보드에 연결했다. 점검 소프트웨어와 통신을 시작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시간뿐.

“무엇이 달라진 것이죠?”


공학자의 물음이라 현수는 편안하게 답한다. 30분 뒤, 아만다의 같은 질문에는 제임스가 다소 다른 답을 한다.

좀 더 똑똑해졌지.

그것으로 아만다는 만족. 아만다는 스크린의 제니를 향해 꺼진 새 기기를 켤 것을 요구. 곧 두 대의 제니가 나란히 아만다의 앞에 선다.

제니, 수습기간 동안 고생했어. 이제 정식 채용을 할까해. 우선 너희는 서로 배터리 관리를 해주며, 나를 따라다녀. 본체는 브래든을 도와서 자재관리를 시작하고.
네. 아만다. 아니, 회장님. 그럼 이제 급여도 주시는 건가요?

아만다는 무심결에 제임스를 바라본다. 제임스는 현수를. 현수는 두 마리의 기계 몸이 만들어내는 무표정함을 바라본다.

이번 연도는 안 되겠는 걸.
유감이지만, 내년을 기대할게요. 그럼, 지금부터 생산관리와 자재관리를 동시에 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해.

아만다는 대화를 마무리했다. 제임스는 그녀에게 작별 인사. 그녀는 현수에게 또 보자고 했다.

제니가 급여를 달라는 건 무슨 의미였을까?

제임스가 차 안에서 현수를 향해 묻는다. 현수는 고민 중.

모르겠습니다. 농담이라면 좋겠군요.
당연히 농담 아니겠나?

제임스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현수는 생각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