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유진, 1964

냉동소설 · 2025.12.21

50살의 눈은 주름이 무색하게 열정가득.

같이 GE로 같으면 하는데.

3년 전 처음 밥을 만났을 때부터 어제까지 밥은 한결같았다. 한결같이 유진에게 불친절. 그가 오늘 눈높이를 맞추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유진은 함께 가자는 말보다 빗나간 예상이 기뻤다.

싫어요. 에디슨이.

본심은 아니지만 거절은 조건반사. 그것이 그녀의 인생. 밥은 천천히 돌아섰다. 힘겨운 권유를 주고 물렸다. 그것으로 됐다.

언제나 거대했던 밥의 등이 오늘만은 평범해 보인다. 밥의 머스탱이 멀어진다. 흙먼지가 잠잠해지고 유진은 돌아섰다.

좋은 분이지?

지나는 유진을 보면서 웃었다.

아니요.

유진은 뽀로통한 표정.

밥의 책상 위에는 논문 한 편만 덩그러니. 초고 같이 보이는 것을 유진이 한 장 넘겨본다.


― 유진에게.


유진의 눈이 화등잔만. 밥답게 ‘고맙다’다는 별도의 메시지는 없었다. 유진은 밥의 친필을 엄지로 쓱, 훑고 넘긴다.


― 시간과 컴퓨터


표지와 다른 제목에 일그러지는 유진의 표정. 그녀는 논문을 덮고 주위를 살폈다. 지켜보는 눈은 없다. 남몰래 논문을 챙긴다.

집으로 돌아와 밥의 논문부터 펼친다. 그가 GE로 이직하기 전에 생각한 것은 Y2K문제. 30년 뒤, 21세기가 되면 일부 프로그램은 1900년과 2000년을 구분하지 못한다. 어떤 문제가 있을지는 밥도 예측불가.

놔둬도 큰 문제는 없겠지. 큰 불편과 경제적 손해는 일부 있을지도.

그는 세상에서 제일 먼저 그 문제를 지적했다는 것에 만족했다. 똑똑한 후배, 유진 같은 사람들이 해결할 것이므로.

유진은 밥을 도와 이 문제를 제기하는 논문을 준비했었다. 밥은 그녀의 이름을 올리려고 했으나, 유진은 거절했다.

있는 자료를 모았을 뿐이에요.
무시할 수 없는 기여도야.
싫어요. 사소한 것은.

밥은 다시 권하지 않았다.

펼쳐든 논문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형식은 논문이지만 엄밀하지 않았다. 전혀 밥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유진이 모은 자료들이 근거로 많이 쓰이기는 했다.


인류는 여러 차례 밀레니엄 문제와 같은 사소한 문제를 극복해 나갈 것이며,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러나 100년 이내로 인류는 쉽게 극복할 수 없는 인공지능 문제를 맞이할 것이다.

지금의 컴퓨터는 단순히 정해진 계산을 하는 기계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30~40년 뒤 컴퓨터는 특정 문제에 관해서 인류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을 계산해 낼 것이다. 컴퓨터의 계산 과정과 결과를 보고도 인류는 그것을 납득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후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지능을 가진 컴퓨터가 등장하면, 인류는 존망에 대한 문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 더 이상 ESC키가 작동하지 않게 될 것이다


누가 ESC키를 만든 사람 아니랄까봐.

혼잣말 하며 피식. 벌써 그리운 밥.

그의 글은 엄밀하지 않았으나 특유의 근심걱정은 남아 있다. 유진은 당장 밥에게 달려가 묻고 싶다. 이 요상한 페이퍼의 정체를. 밥은 간략히 한 두 마디 되돌려 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그는 떠났다.

밥을 만난 지 3년. 그동안 유진의 키는 2인치 넘게 자랐다. 가슴도 조금은 커졌다. 어른이 된 것도, 최연소 입사 기록이 깨진 것도 아니지만, 밥을 넘어서겠다는 다짐은 지키지 못했다.

사석에서 밥은 말했다.

천재들이 불운하다고들 하지만,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들은 지능과 관계없이 불운할 수밖에. 사회성을 좀 갖춰.

‘너만 할까.’ 목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키며. 나중에야 그것이 밥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임을 알았다.

같이 갈 걸 그랬나. GE.

유진은 밥의 논문을 덮고, 창밖을 바라봤다.